[특집]영인이출산기

이글은 영인이엄마가 영인이를 낳기직전... 그리고, 낳은 후부터 지금까지 영인이를 키우면서 적은 글이다. 출산양육기라고 할 수 있다.
참... 우리 민경이는 훌륭한 엄마인거 같다...
그 가냘픈 몸으로... 애를 밤새도록 안아서 재우다니... 낮에 병원에서 많이 스트레스받는데.. 집에서까지.. 힘들게 할 수 없다는... 민경이의 말이 생각난다....
참고로... 나는 조금씩 생각나는게 있어서... 보면서 조금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그리고, 글 중간중간에 욕도 나오고... 너무 솔직하게 적어서... 읽기가 거북(?)한 부분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전하기 위해... 수정없이.. 그대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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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이 출산기

2005년 5월20일 아침 9시 일어나는데, 왠지 다른 때랑 달리 아랫배가 불편하다. 화장실에 가니 핑크색 피가 조금 비친다. ‘혹시?.. 통증도 미약하나마 조금 있는 거 같고!!’ 우선 마음은 다급해, 얼른 제언이(남동생)한테 전화해서 누구든 내 옆에 와 달라했다. 신랑한테도 아기가 나올 것 같다며 전화했다. 전화하는 도중 화장실에 가니, 다시 핑크색 피가 연신 확인된다. 병원에 입원할 준비물을 주점주섬 챙겼다. 조금 있으니 설매(올케)가 집에 왔다. 신랑이 자꾸 전화를 해댄다. 전화 도중 양수가 조금 흐르는 것 같아 패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설매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샤워를 했다. 또 몇 주일은 씻지 못할꺼란 생각에, 샤워 중간중간 통증이 오면 배를 잡았다 말았다 하면서도 말이다. 통증은 제법 짧은 시간 규칙적이긴 한데, 그래도 생리통에도 미치지 못했다. 아직은 아닐꺼란 생각에, 마음과는 달리 행동은 무지 느긋해져서 설매한테 밥을 준비해서 먹자고 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샤워 때처럼 통증이 왔다. 그래도 크게 아플 정도는 아니여서, 배를 잡고 신음 좀 하다가 또 먹다가를 반복했다. 설매는 시간을 재더니 연신 병원에 가자고 난리다. 난 마이클럽과 미즈넷에서 너무 출산기를 많이 읽어서, 웬만하면 버티다 막판에 갈려고 맘 먹고 있던 참이였기에, 되려 설매를 달래며 꾿꾿이 밥을 다 먹었다.

밥을 다 먹을 즈음 설매가 5분 4분 간격이던 통증이 2분이 되기도 하니 이젠 얼른 가자고 재촉하고, 나도 ‘그럼 이젠 슬슬 가 볼까’ 하는 마음에 집을 나서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도중의 통증은 제법 아팠다. 뭐 그래도 택시 안 손잡이를 부여잡고 간간이 오는 진통에는 ‘으음..’ 하고 이를 앙다물면 참을 만했다. 택시 운전사 아저씨가 임신부라고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동아대병원까지 태워다 주셨다.

택시에서 내려 병원 안까지 들어가는 동안이 조금 힘들기 시작했다. 발을 내딛어 걷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주르륵’ 양수가 제법 많이 세는 것이 느껴졌다. 걷다 쉬다를 반복하며 우선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서는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가 나를 휠체어에 앉혔는데, 응급실에 있는 것이 멋적을 만큼 그 동안에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내 차트를 앉은 무릎 위에 얹고 아주 익숙한 분만대기실로 향했다. 초음파를 찍던 방에서 내진을 했다. 간호사한테 양수가 새고 있다고 일렀더니, 얼른 남자 레지던트 의사를 불러왔다. 패드를 벗기니 제법 핑크색 피가 많이 뭍어있는 게 눈에 보였다. 양수가 많이 샌 것 같다며 의사가 내진하더니 40~50% 진행됐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너무 일찍 오지 않고 계획대로 맞춰 잘 왔다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큰 오산일 줄이야...ㅜㅜ

익숙한 환자복을 갈아입고 분만대기실에 누웠다. ‘그 정도 진행인데 이 정도 밖에 아프지 않나?’ 조금 의아하다. 초산이라 초기 자궁문이 열릴 때 진통이 무지 아프다던데... 내가 조기진통으로 입원한 환자여서 그런가? 암튼 간호사가 “이제는 아이 낳으면 되는 거니까 아파도 잘 참으세요.” 한다. 뭐 각오한 일이니까.. 되려 빨리 나오기를 고대하기도 했던 일 아닌가..

눕자마자 그 지겨운 수술용 대바늘로 링겔을 꼽았다. 뭐 아파도 한 번에 끝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쉐이빙을 했다. 전체 다 미는 줄 알았는데 딱 회음부 부위만 하는 것 같았다. 남자 싸구려 일회용 면도기로 하는 것 같았다. 내 피부는 무지 연약한데 무시하고 벅벅 미니까 따끔거렸다. BUT 별 저항은 하지 못했다.ㅜㅜ 그리곤 관장을 했다. 좌약을 넣고 10분 참으랬는데, 나는 금방은 아니지만 한 5분만에 화장실에 갔다.

언제부터인지 드디어 진통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안 아플 때 무조건 깊은 숨을 쉬어놓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였다. 아프면 ‘아~’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아프지 않으면 ‘우후우후’ 하고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이 제법 진행된 듯 싶었다. 뭐 여기까지도 견딜만 했다.

시계를 계속 보면서 진통했는데도 지금 쓸려니 몇 시에 어땠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긴 출산한지 이제 2달이 지나 쓸려니..^^; 아무튼 간호사가 보고 가더니, 저녁 6시나 7시에는 나오겠다며 5cm 열렸단다. ‘아직 몇 시간은 더 견뎌야 하는구나..’ 하고 지레짐작으로 통증을 계속 견디고 있었다.

진통의 강도가 한참을 지나니 급격히 강해졌다. 그동안 익숙한 여자 레지던트 의사가 계속해서 30분 간격으로 내진을 해댔다. 나는 의사를 보자마자 “무통 놔 주세요!” 하고 외쳤다. 근데 너무 늦게 와서, 진행이 50%나 되어 해 줄 수 없단다. 으앙 그럼 그 고통을 생으로 통째 견뎌야 한단 소린가... 진통 오자마자 바로 올 껄.. 무지 후회된다. 내가 조기진통환자란 사실을 망각하고, 남들과 똑같을 꺼라고 바보같이 믿고 있었나 싶다. 후회막급이다.

무통을 포기하고 침대에서 견디기로 맘 먹었다. 근데 내 침대 바로 앞에는 인턴 남자 의사가 앉아 있었는데, 별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 짜증났다. 통증이 심해지니 나는 이상하게 손과 발이 저리기 시작했다. 그 인턴 의사더러 손발이 저려 움직일 수 없다고 호소했더니, 레지던트 의사한테 물어보고 오더니 원래 그렇단다. 참나.. 진통 간격이 점점 짧아져 오고 강도가 높아졌지만, 머리 속으로는 ‘뭐 그래도 죽을 만큼은 아니구나.’ ‘참을만 하구나.’ 싶었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힘들어도 소리만 나올 뿐 눈물은 나지 않았다.

진통 중에 항문에 힘주는 것처럼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대로 힘을 주었다. 오후 1시쯤 한 내진은 거의 손을 자궁 안까지 넣어 돌리는 듯한 느낌이였는데, 그 내진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거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느낌처럼 ‘아아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소리를 지르니, 간호사가 아이 낳은 줄 알았다며 뛰어왔다. 머리로는 아직 이 정도 소릴 지를 만큼은 아니란 생각이 드는데, 소리는 이미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하긴 1시에 다다랐을 때에는 아프지 않을 틈이 없어 거의 긴 숨을 쉬지 못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러더니 내진한 의사와 간호사가 뭐라고 얘기를 심각하게 하기 시작했다. 나보고 힘이 주어지냐고 묻고 나는 용변감이 든다고 했다. 의사가 힘을 주어 보란다. ‘끄응’ 하고 변비에 치질이 있는 나는 평상시 화장실에서 힘주듯이 힘을 주었다. 중간에 힘을 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숨은 다행이 한번 쉬면 길게 주어졌다. 자꾸 용변감이 들어 정말 변을 보는 건 아닌가 싶어 ‘지금 화장실에 가도 되요? 똥 누고 싶은데요..’하고 묻기도 했다.

의사가 6cm 열렸는데 아기가 숨을 쉬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자 간호사가 인공호흡기를 가져와 내 코에 달았다. 자꾸 깊은 숨을 쉬란다. 누가 모르나.. 근데 아파서 소리지르기 바빠 숨 쉴 틈이 없는 걸 어떡하나.. 간호사가 옆에서 따라하라고 ‘우후우후’ 할 때만 따라하고 계속해서 ‘악~’ 하고 비명만 질렀다. 얼마안가 NST 신호음이 갑자기 떨어졌다. ‘삐~’ 소리가 나자 간호사가 아기가 숨을 쉬지 못한다고 엄마가 숨을 쉬란다. 그 말을 듣고 아이 생각에 얼른 숨을 깊이 쉬어야 하는데도,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냥 마냥 아프기만 했다.

의사가 갑자기 분만실로 가자고 했다. 도저히 아기가 위험해 안된단다. ‘저녁에 낳을 꺼라더니 이제 오후 1시를 넘긴 시간인데... 이렇게 빨리 나오나?’ 싶었다. 그러더니 이동 침대를 가져와 나보고 옮겨 타란다. 이 고통에 옮겨 타라니.. 그래도 정신없이 시키는 대로 옮겨 탔다. 잘 못 움직이니까 간호사가 아기를 생각해서 힘을 내란다. 아기보단 내 자신이 힘이 들어 얼른 낳고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잘 못 움직이니까 옆으로 굴러란다. 역시 시키는 대로 하니까 다 된다. 굴러서 침대에 옮겨 누웠다. 똑바로 누울 수 없어 모로 세워 누워 바로 정면 앞에 있는 분만실로 실려갔다.

분만대도 낯이 익다. 암튼 다시 분만대로 옮겨 앉아 다리를 벌리는 자세를 취하란다. 이때는 통증이 극심하지는 않고 그저 들리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데 온 신경이 집중됐다. 다시 굴르듯 해서 분만대에 앉았다. 아프단 생각보다 이젠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회음부에 마취를 하나보다. 한 6개쯤 달린 압정으로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아프다. 아무튼 마취 직전까지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숨을 가쁘게 쉬는 게 전부였다.

마취를 하고나니 수술기구 소리는 들리는데 살이 잘리는지 피가 얼마나 흐르는지 모르겠다.의사의 힘주란 소리가 연신 들린다. 나는 힘을 잘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간간이 소리는 괴성을 지르지만.. 뭐 호흡도 한번 넣으면 끊어지지 않게 최대한 길게 주었고, 똥고 힘도 평상시 주던 가닥이 있었으니 자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힘을 주란다. 이보다 어떻게 힘을 주란 말인가..

뭐가 위험한지 의사 둘이서 얘기를 하더니 한사람이 내 배 위에 올라탔다. 그러면서 내 배를 마구 눌러 아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밑에서는 뭔 기구로 빨아내는 것 같았다. 뒤늦게 알았지만 흡입분만을 했던 것이다. 자궁문은 6cm밖에 열리지 않았지만, 아이가 호흡하기 힘들어해서 시도했단다. 자연히 골반도 양쪽 다 벌어지지 못했던 터인데, 아기가 벌어지지 않은 골반에 머리를 넣고 나오질 못하고 있었단다. 그래서 회음부외에 엉덩이 살을 항문 밑까지 절개했단다.

자연분만은 입원기간이 2박 3일이고 대부분 그 기간 내에 곧바로 걷고 앉을 수 있다던데, 나는 입원기간 내내 걷기가 힘들었다. 앉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좌욕을 열심히 하라고 해서, 매일 3번씩 했는데도 얼른 낫지 않았다. 퇴원하고 산후조리원에 가서도 1주일은 누워 지냈다. 밥도 서서 먹고 거의 앉아있질 않았다. 한번 일어나는데 정말 힘이 들었다. 손목에 힘을 주고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몸을 엎드린 자세로 돌리고, 다시 팔꿈치로 힘을 받쳐 엉덩이를 들고, 그리곤 다시 옆에 둔 보조의자를 집고서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화장실도 고역이였다. 방구에도 봉합부위가 아팠다. ‘아으으~’ 소리 내며 방구를 뀌는 건 정말 고역이다. '아~‘ 소리를 내면 신랑이 어디 아프냐고 묻고, 나는 번번히 ’방구꼈다‘고 대답해야 했으니 말이다. 신랑이 그 대답에 여지없이 웃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나쁜 쉐이.. 그러니 변 보는 일은 말을 해야 더 무엇하겠는가..

좌욕하는 동안도 좌욕기에 앉고 서기가 힘들어 앓는 소리를 내거나, 좌욕기 물이 뜨거워 ‘앗 뜨거버러라! 으아 똥고 뜨거버!’ 하고 소리를 지르면, 신랑은 자기를 쳐다보고 소리 지르지 말라며 얼굴을 가리고 킥킥 거렸다. 이씨 더 나쁜 쉐이야 너는... 덕분에 조리원은 계획한 3주보다 1주가 더 는 4주가 되었다. 지겹지도 않냐고 다들 물었지만, 나는 내 몸을 회복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

그러니 지금도 산부인과와 항문외과에 가면 의사들이 모두 ‘많이 절개하셨네요..’ 한다. 그만큼 나는 봉합부분이 아무는 동안 고생이 심했다. 2개월이 지난 지금도 고생한다. 아직도 계속 염증이 생겨, 치질 수술 때 항문의가 항문 옆 봉합부분은 곁다리로 껴서 같이 수술하기로, 알아서 결정해 줬을 정도다.

오로도 7주나 계속됐다. 알고 보니 태반이 남아있어 그랬단다. 태반을 다시 마취 없이 긁어내는 날은 정말 또 아기 낳는 줄 알았다. 아직도 오른쪽 엉덩이론 힘이 잘 주어지질 않는다. 암튼 아프다. 그저 이렇게 글 한 줄로 ‘아프다’ 라고만 쓰는 게 너무너무 억울할 정도로, 아무는 과정이 아팠고 지금도 아프다.

내가 앉지를 못한 덕에 영인이가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빨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유축기로 젖을 짜서 젖병에 넣어 먹인다. 유축기에 적응하느라 젖꼭지가 헐고 피가 나서, 딱지가 앉을 때까지 메디폼이란 반창고를 항상 붙여둬야 했다. 우선 반창고를 붙이면 피가 빨려나오지 않아 좋지만, 다시 그걸 떼어내는 것이 문제였다. 암튼 산후조리원복을 항상 두 손으로 살짝 들고 다녀 젖꼭지가 닿이지 않아야 겨우 아프지 않았을 정도다.

젖몸살도 심했다. 신랑이 있는 동안 가슴 마사지를 하면 매번 울었다. 신랑이 엄살 부리듯 우는 걸로 보인다며, 별로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결국엔 젖몸살 관리사를 불러 젖몸살을 풀고서야 몰랑몰랑한 젖을 되찾을 수 있었다. 왜 성경에는 출산의 고통이 있다고만 하고, 젖몸살도 무지 심할꺼라고 일러주지 않았는지.. 아니면 출산의 고통만 있다고 했으면 젖몸살은 안하게 해주던지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프다고 미리 언질을 받았어도 이만큼 아플지 정말 몰랐다. 가슴도 쪼꼬만 게, 젖도 많이 나오지도 않으면서 암튼 할 껀 다 한다.

그렇게 흡입분만을 시도하는 동안 나는 이제 시키지도 않는데도 ‘으으~으음’ 하며 힘을 연신 주었다. 의사들은 자기 일에 바빠 나더러 힘주란 말도 하지 않는다. 그다지 오랜 시간은 아니였던 것 같다. 그러더니 정말 응가처럼 뭔가 쑤욱 하고 밀려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분만대에서는 힘을 주거나 호흡기를 통해 숨만 가쁘게 쉴 뿐, 마취를 해서인지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숨을 쉬며 힘 주는 과정이 버거워 소리를 크게 지르게 되었다. 아기가 나오고 곧이어 태반도 쑥 나오는 기분이 들고, 이내 아이 우는 소리도 들렸다.

드디어 끝이란 생각이 들면서, 새삼 정신을 차리고 의사와 간호사에게 “죄송해요.. 난리를 쳐서..” 하고 깍듯이 인사도 했다. 내가 너무 착한 산모 같다.. 입원기간 동안 분만실에서 소리 지르는 산모와 아이울음소리를 제법 들었지만, 비교 결과 나는 뭐 심하지 않은 것 같고 영인이는 울음소리가 제법 크고 오래 가는 것 같았다. 진짜다.

간호사가 아이를 씻기고 나는 후처치를 받았다. 십자수를 놓나.. 엄청 오래 깊는다. 회음부 안쪽부터 깊고 바깥 회음부까지 기워나가는 느낌이였다. 분만대기실의 그 남자 인턴이 옆에 서서 열심히 보조를 한다. 다 여자인데 혼자 남자라 조금 껄끄러웠지만, 뭐 생각만 그럴 뿐 얼른 잘 꼬매줘으면 하는 맘이 굴뚝같다.

꼬매는 도중에 간호사가 아기를 보여준다. 뭐 손가락 발가락 다 벌려 정상이라고 확인시켜준다. 지금 이 상황에 아기가 잘 나왔음 됐지 뭐 그리 일일이 보여주나.. 나는 ‘됐어요. 얼른 이거나 잘 꼬매줘요’ 하는 마음에, 잘 보지 않고 손을 내 저었다. 뭐 분만 중 안경을 벗겨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아기를 눈 가까이 대어 달래서, 윤각만 본 정도다. 간호사 혼자서 “1시 50분 출생 몸무게 2.945kg...” 뭐라고 뭐라고 연신 얘기해준다.

아기를 낳고 나니까 정말 배가 아픈 진통은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마취가 덜 풀려서이지 앞으로 또 다른 회음부 부분의 진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한참을 봉합한 뒤 나는 다시 분만대기실에 실려왔다. 역시나 또 굴러서 누웠다. 간호사가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고 하혈한 심한 부분에 연신 오로 제거용 패드를 교환해댄다. 정신을 차리고 이불을 걷어 살짝 내려다보니 다리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흐른 자국이 단박에 눈에 띈다. 저만큼 피를 철철 흘렸단 말인가.. 지금도 마구 흐르고 있는 중인데... 힝...

누워있으니 간호사가 와서 자궁수축 정도를 알아본다고 계속 배를 눌러댔다. 그것도 만만찮게 아팠다. 어느새 간호사 손목을 잡고 말리고 있을 정도다. 수시로 눌러댔는데 그 때마다 반사적으로 내 손이 나가있었다. 누를 때마다 피가 훅 하고 쏟아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이 때 뭘 잘 못 눌렀는지 한동안 훗배앓이도 했다.

그러는 동안 간호사가 아기 젖을 물려보겠나며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때의 영인이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건, ‘앉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아이 젖을 물리라는 황당한 제안을 하는지..’ 하는 심정에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 안았기 때문이다. 시도를 했지만 젖은 물리지 못했다. 얼른 간호사에게 돌려주며 그만하겠다고 했다. 간호사가 남의 아이 보듯 하지 말고 더 물려보랬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분만 후 4시간 이내에 소변을 보지 않으면, 소변줄을 꼽아야 한다고 간호사가 일러주었다. 4시간이 지나도 요의는 생기지 않았다. 소변줄 꼽으면 아프다던데, 나는 무지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도 간호사가 기다려주고, 결국 나는 5시간 정도 지나서 걸어서 화장실에 가 소변을 볼 수 있었다.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길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말이다. 뒤늦게 간호사가 플라스틱 소변대를 보여주며 그냥 침대 위에서 누어도 되었다고 일러주었다. 착한 산모인 나는 갔다 오느라 힘들었던 게 억울하긴 했지만 “바닥을 버려서 죄송해요.” 하고 또 깍듯이 인사했다.

보호자 면회가 가능했는지 설매가 짐을 챙겨 들어왔다. 전화기를 챙겨 달래서 신랑이랑 여기저기 전화를 해 자연분만 했다고 전했다. 신랑은 벌써 아기가 나온 게 신기한 모양이다. 신랑 없이 혼자 낳는 것도 서러운데, MSN 아이디에 ‘야호! 복띠~이(영인이 태명) 진행 50%’ 이딴 네임이나 써 놓고 출산을 마냥 좋아라 했다는 소식을 듣자 더 화가 났다. 아니 긴 입원기간을 거쳐 힘들게 아기를 낳는 마누라 걱정은 도대체 어디로 가출한 것인가... 역시 나쁜 쉐이다.

신랑은 다음날 비행기로 와서도 역시 가관이였다. 꽃바구니를 덜렁덜렁 들고 와서는(곁다리로 껴주는 장미 한 송이 포함) 그냥 웃고 끝이다. 뭐 따뜻하게 손을 잡고 눈물을 한판 흘려야 정상 아닌가.. 선물도 한번 펴서는 지고 마는 저 꽃바구니가 다 뭔가.. 돈이 되는 걸 해 와야지.. 아직도 자기는 대단한 선물을 한 걸로 심하게 착각하고 있다.

분만대기실에서 일반병실로 갔다. 마침 내가 입원했던 그 방이다. 참 여러모로 익숙하게 맞춰주는군.. 엄마랑 같이 하룻밤을 보내면서 정말 많이 아팠다. 누워서 자세를 바꾸면 나아질까 여러 번 힘들게 움직여 보기도 했다. 움직이는 것도 아픈 곳을 살살 달래가며 손으로 다리를 끌어올려야 돌아누울 수 있었기 때문에 너무 힘이 들었다. 시계만 보며 견디다 못해 새벽에는 엄마더러 간호사한테 무통주사 좀 놔 달래라고 부탁했다. 계속 ‘끙~’ 하고 앓고 있는 나를 보고 간호사가 의사한테 물어보고 오더니 주사를 한 대 놔 줬다.

주사를 맞아도 하나도 차도가 없었다. 계속 아파 다시 주사를 한 대 더 놓아달라고 했더니, 안된다며 약을 주었다. 약을 보니 타이레놀이다. 이거 한 알로는 나한텐 두통도 씨알도 안먹히는 것을.. 그래도 그거라도 먹고, 일본에서 오는 신랑더러 타이레놀 한 통을 사 가지고 오랬다. 간호사에게도 약을 더 달래서 먹고서야, 아침 나절이 되어 겨우 진통이 줄어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밤새 잠 한숨 못자고 말 그대로 끙끙 앓았던 것이다.

다음날 시댁식구들이 먼저 오고 신랑도 곧이어 왔다. 아기 면회시간만 기다려 같이 면회하러 갔다. 가는 동안도 한걸음 떼기가 정말 벅찰 정도다. 그제서야 나도 아기를 똑똑히 보기 시작했다. 머리숱이 너무 많았던 것이 기억났다. 신생아실에서 모두들 ‘어느 아기냐’고 궁금해 할 때 나는 그저 머리숱을 보고 알아맞힐 수 있었다.

유리벽으로 보니 영인이는 털이 정말 뭔 원숭이 새끼처럼 많았다. 어깨에 검은 긴 털이 숭숭 나 있는 것을 보고 걱정했을 정도다. 나중에 조리원에서 웃통을 벗겨보니 등짝도 털이 숭숭 나 있는 것이 아닌가... 뭐 걱정과는 달리 배내옷에 다 뭍어 빠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정상인으로 보인다.

그 날 저녁과 다음날까지 영인이에게 젖을 물려 볼려고 몇 번 더 수유실에서 시도해 봤지만, 다들 내 앉는 자세를 보더니 다음으로 미뤄주었다. 자세가 불안정하니 아기 맡기기가 간호사들도 미덥쟎았나보다. 수유를 뒷전으로 하니 나는 좌욕에 매진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더 많이 해야 통증이 덜하고, 그 방법 말고는 딱히 처방이 없다길래 열심히 했다. 조금씩 아주 느린 속도로 한발한발 겨우 뗄 만 하니 퇴원해야 했다. 그런데 아기가 황달이 심하고 두혈종이 있는데다 호흡속도가 불규칙해서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만 우선 퇴원해서 조리원에 가고 아기는 병원에 두고 나왔다.

조리원까지 가는 차 안에 앉는 것도 정말 공포였다. 겨우 이불을 터번처럼 만들어 앉았지만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정말 죽음이였다. 조리원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내 걸음걸이를 보고는 나를 배려해 주었다. 오후에는 입원 수속하러 간 신랑과 식구들이 도로 아기를 데리고 왔다. 일반 산후조리원이 아닌 병원 내 신생아실에 아기를 맡길 수 있다고 하자, 엄마와 아기가 같이 있는 게 좋다며 아이를 위생병원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신랑이 얼굴이 함지박이 되어서는 덜렁덜렁 아기를 안고 왔다. 자기가 안고 있는 게 무지 대단해 보인다는 표정이다. 아직도 조리원에서 같이 있어준 기간 동안의 신랑 얼굴 표정이 내 눈에 선하다. 더운 방에서 땀을 주룩주룩 흘려가며 영인이를 안고서, ‘우히히 우히히’ 하고 웃던 표정이 말이다. 아직 얼굴도 누렇고, 불그락 불그락 여기저기 붉은기에, 거디다 눈도 못뜨고... 암튼 조그마니 못생겼는데도 마냥 좋은가 보다.

척 보면 영인이는 영판 아빠다. 우선 뭐 눈이 지대로다. 내가 그것 때문에 딸이 아니기를 바랬는데.. 암튼 아들이라 무지 다행이다. 그리고 뭣보다 이마... 아빠의 무지하게 넓은 이마에 나의 만만찮은 넓은 이마가 보태져 얼굴의 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붕알도 무지하게 크다. 귀저기 갈 때마다 축 처진 라인이 똥고까지 이어진다. 음하하.. ^^ 거기다 오죽하면 손금도 아빠다. 특이한 Two Line...

자세히 보면 나 닮은 데도 많다. 우선 그나마 그 작은 쭉잡아 올라간 눈에 속쌍거풀이 있다. 광할한 이마 위로 난 엄청난 새카만 머리숱도 내 덕분이다. 그리고 귀.. 신랑의 이상한 귀와는 달리 영인이는 귓바퀴며 귓밥이 제대로다. 코 밑의 송송한 다량의 솜털도 나 때문이고, 발가락이 긴 것도 나를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째 발가락이 더 긴 것, 그리고 발가락 근육이 짧아 웅크려져 있는 건 아빠 때문이다.

영인이가 얼굴색이 많이 노란 건 난산 때문이다. 스트레스로 태변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또 두혈종으로 머리뼈가 물렁물렁한 건 흡입분만 때문이다. 다행이 지금은 멀쩡하다. 얼굴도 ‘뽀얀이’가 됐고, 두상도 완전 짱구다. 초기에 2번 설사를 너무 심하게 해서 설사분유를 따로 먹어야 할 정도로 힘들어한 것 외에는, 초기 입원해야 했던 호흡 불규칙 현상도 모니터링 상에서 거의 사라졌다.

2주 정도 지나고 회진하던 담당 소아과 의사가 나를 불렀다. 그러더니 영인이 오른쪽 목을 만져보라고 했다. 놀란 눈을 하고 만졌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그러더니 “여기 멍울이 만져지시죠?” 한다. 얼떨결에 “네..” 했더니, “선천성사경입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처음엔 병명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정형외과에 가 보라고 한다.

급한 대로 위생병원 정형외과에 갔다. 근데 그 대머리 의사는 뭐 별거 아니라고 내버려 두면 차차 좋아진단다. 별다를 운동도 필요 없단다.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래서 신생아실 수간호사를 졸라 삼칠일도 안 된 아이를 안고, 영인이가 태어난 동아대 병원으로 갔다. 동대 병원에서는 아이 목을 좌우로 돌려보더니 선천성사경 진단을 확인해주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대단히 큰 병 같았다.

의사는 스트레칭 시키는 방법을 일러주면서 나보고도 해 보란다. ‘내가? 전문인도 아닌 내가?’ 엄마라지만, 위험한 목 비트는 일을 직접 하기가 겁이 났다. 그리고 너무 작은 갓난아이 아닌가... 우선 의사가 목을 좌우로 돌리니 영인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보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면서, ‘흑흑’ 하고 안타까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냥 의사 손을 쳐 내고 싶었다. 하지만 발은 성큼 다가섰는데 손을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곤 의사 지시에 따라 내 손으로 영인이의 목을 돌리게 되었다. 손이 떨리고 잘못될까 하는 맘에 한번 해 보고 말았다.

아이가 너무 작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2개월이 되면 초음파를 찍어보자고 했다. 하지만 일찍 발견해 매일 물리치료 하는 게 좋으니, 집에 가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5~10분씩 해 주란다. 동대병원은 아기의 세균감염 위험이 크니 병원에 오지 말고 집에서 꾸준히 해 주라고 했다. 지금 하고 있는, 그리고 전에 받았던 보이타 치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도, 그 때는 정말 참담했었다. ‘어찌 매일 저렇게 하나..’ 싶은 맘 뿐이였다.

조리원에 데려 와서는 그냥 오른쪽을 보게 고개를 돌려놓는 일만 열심히 했다. 목을 돌리는 일은 내 손으로는 정말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보이타 치료를 한다는 다른 병원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찾아갈 요량이였다. 문화병원에서 치료한다고 해서, 다시 그 병원에도 데려가려니 위생병원에서 말렸다. 아기가 너무 힘이 들고 병원시설에 자주 가는 게 좋지 않다고 했다. 되려 감기라도 걸리면 금방 폐렴으로 번질 꺼라고 겁을 주었다.

병원에서도 혹 우리 아기가 외부 병원 병균을 옮겨와 다른 아기한테 옮기는 걸 극히 꺼려하는 눈치였다. 조리원에서의 4주는 그냥 아기를 쉬게 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조리원을 나서서는 곧바로 문화병원 소아 물리치료실로 찾아갔다. 일주에 2번씩 3주를 받기로 하고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영인이가 매번 자지러지게 울었다.

보이타 치료는 아이를 잡는 일 같았다. 처음 자세는 아이가 누운 상태에서 얼굴과 어깨사이에 치료사가 무릎을 넣고, 한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고정시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의 명치를 중심으로 하는 좌우 젖꼭지 밑을 꾹 눌러주는 것이다. 다음 자세는 아이를 모로 세워서 어깨와 허리 부분을 잡아 고정시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엎어놓고 역시 어깨부분에 치료사의 무릎으로 고정시킨 다음. 팔꿈치와 발의 복숭아뼈 부분을 누르고 아이의 운동반응을 살핀다. 그 모든 과정에 아이가 고개도 마음대로 젖히지 못하고 울어댄다.

정말 병아리 눈물 같은 눈물이 질끈 감은 눈 사이에 맺혔다 풀렸다를 반복했다. 쪼꼬만 게 벌써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우는 것부터 배우나 싶고, 저러다 목소리가 가거나 성격을 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물리치료사는 집에서도 배운 대로 매일 2시간 간격으로 운동을 시키란다. 차마 그렇게는 못해 하루에 4번 정도 운동을 시켰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영인이는 굉장히 민감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 놀라고, 자기 손이 버둥대는 건데도 놀라는 데 그치지 않고 금방 자지러지는 울음으로 변했다. 목 근처로 손이 오면 울기 시작하고, 눕혀 놓으면 물리치료를 하는 줄 알고 심하게 버둥대며 울어재꼈다.

나는 항상 영인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것도 눕혀서 안는 것도 싫어해서 세워서 안아줘야 한다. 정말 깊이 잠들기 전에는 절대 바닥에 내려놓아서는 안된다. 다시 울기 시작해 도로 재우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여태껏 품에 안고 앉은 자세에서 잠들기 일쑤다. 지금은 앉아서 세워 안는 것도 만족하지 못해서, 서서 안고 위아래도 조금씩 반동도 주어야 한다. 흔들침대도 무용지물이다. 어쩌다 무지하게 기분 좋은 날은 놀다가 잠이 들 때가 있다.

잠이 들어도 5분에서 20분 정도다. 겨우 그거 자려고 그렇게 애를 먹인다. 그리고 다시 얼르기를 반복해야 한다. 밤낮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24시간이 내내 그러했다. 내 몸도 엉망이고, 잠이 부족해 아이를 안고 비틀거리며 걷는 게 다반사다. 아직 나는 몸이 쉬기를 원하는데, 손목이며 팔뚝이며 근육이 뭉치고 늘 시큰거렸다. 그래도 저렇게 늘 치료로 우는 아이를 내 손에서 또 울리고 싶진 않다는 마음에 항상 안고 지냈다. 내가 못안으면 나를 도와주는 이모님, 산후관리사에게라도 맡겨 안겼다.

3주가 되어도 별 차도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으면 어떨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동생이 있는 분당에 지내면서 병원을 다니기로 했다. 건국대 병원과 분당 차병원 그리고 분당 서울대 병원을 예약했다. 서울은 부산과 달리 목 근육 스트레칭과 초음파치료를 했다. 건대 병원은 너무 멀었고, 서울대 병원은 위생 병원처럼 너무 간단히 진단하면서 물리치료도 방법만 일러줄 뿐 집에서 하도록 처방해버렸다.

할 수 없이 차병원을 다니기로 했다. 우선 매일 하도록 3주 처방을 받았다. 영인이는 매일 운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물리치료사가 빠른 속도로 목을 돌릴 때마다, 이젠 제법 눈물이 맺혀 주르륵 흘리면서 서럽게 운다. “우에~~엑, 우에~~엑 ” 하고 목을 돌릴 때마다 울음도 같이 돌려진다. “우후후후~” 하고 중간중간 울음도 다스리기도 하고, 눈을 꼭 감고 울기도, 눈을 뜨고 살려달란 표정으로 올라다 보며 울기도 한다. “음...마~” 하고 제법 엄마를 애타게 찾으며 울기도 한다.

다시 차병원에서도 3주가 되어간다. 영인이는 아직 차도가 없다. 근육이 너무 타이트하단다. 멍울이 작지만 너무 단단해 다 풀릴 지 의문이다. 오른쪽으로 잘 보던 고개도 요사이 왼쪽을 보기 일쑤다. 그리고 치료 때마다 너무 자지러지게 울어서, 목을 돌리기도 힘들고 덩달아 오른쪽 어깨 근육도 뭉쳐졌다. 오른손도 움직임이 적어, 조심스럽게 별도의 물리치료 병행을 언질 받았다. 오른쪽 다리도 뻗침이 덜하여 항상 지켜보게 된다.

영인이의 물리치료는 계속될 것이고, 나도 신랑도 꾸준히 지켜보고 운동시켜 줄 것이다. 시일이 걸리겠지만 반드시 영인이는 완치 판정을 받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물리치료 졸업’의 날도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럴 수 있도록 기도하는 수가 얼마인가? ^^; 그리고 나도 얼른 똥고 수술을 성공리에 마치고, 영인이랑 같이 일본의 마이 홈으로 무사귀환 할 것이다. 일본에서는 영인이가 덜 민감해져서 반갑게 맞이하는 아빠나 함께 도와줄 할머니를 덜 힘들게 하기를...

장문의 출산기를 마치려한다. 애독해 준 모든 분께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후헤헤 ^^;;
마지막 멘트는 이걸로 정했다. 신랑에게는 무척 의미심장한 말이다.
“심하게 아빠가 될 준비가 되어있는 아빠에게 너를 맡긴다. 영인아...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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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마니

2005/07/26 23:21 2005/07/26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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